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움베르토 2세 (문단 편집) === 왕태자(피에몬테 공) 시절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King_Umberto_II_of_Italy_as_a_child.jpg|width=100%]]}}} || || 어린 시절의 움베르토 2세 || [[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]]와 [[몬테네그로 왕국|몬테네그로]]의 옐레나의 외아들[* 위아래로 누이 4명이 있었지만 남자는 움베르토 2세 혼자라 유일한 왕위 계승자였다.]이며, 출생 2주 만에 왕태자 지위인 피에몬테 공(Principe di Piemonte)[* 원래는 로마 공(Principe di Roma)이 될 예정이었으나 당시는 [[라테라노 조약]]이 체결되기 전이라 [[교황청]]과 [[사보이아 가문|사보이아 왕조]]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, 손자의 탄생 소식을 들은 할머니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괜히 교황청을 자극하지 말라고 해서 사보이아 왕조의 전통에 따라 피에몬테 공을 받았다.]이 되었다. 왕태자 시절엔 왕실 인사 자격으로 [[남미]]와 이탈리아령 [[소말리아]]를 방문했다. 1929년 [[벨기에]]의 [[마리조제]] 공주[* 이탈리아어: Maria Jose del Belgio(마리아 요세 델 벨조), 프랑스어: Marie-José de Belgique(마리조제 드 벨지크), [[알베르 1세]]의 딸이자 [[레오폴드 3세]]의 여동생.]와 결혼했는데 혼사에 관련해서 벨기에를 방문했을 당시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. 움베르토 2세는 동성애자였고, 사랑이 싹틀 여지가 없던 부부 관계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. 결혼식 당일 밤에도 두 부부는 합숙하지 않았고, 움베르토 2세는 난음 파티에 참석했었다고 한다.[* 참고로 결혼식에 마리조제 공주가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움베르토 2세가 직접 디자인했던 것이라고 한다.] 마리조제는 [[베니토 무솔리니]]와 염문설이 돌기도 하였다.[* 이에 대해 [[클라라 페타치]]는 자신의 일기에 마리조제가 먼저 무솔리니를 유혹했다가 실패했다고 적었고, 무솔리니의 아들은 그녀와 자신의 아버지가 짧은 기간 로맨틱한 사이가 되었지만 문제가 되자 아버지 쪽에서 먼저 정리했다고 주장했다.] 움베르토 2세는 젊은 군 장교나 운동선수, 영화계 인물들과 사귀었고 이들에게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라이터, 보석 등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. [[베니토 무솔리니]] 집권기에는 부왕과 다른 왕족처럼 무솔리니에 협조적이었는데, 1920년대부터 왕실 관련 자료들을 모은 무솔리니가 동성애자였던 움베르토 2세를 아웃팅하겠다고 협박했었다고 한다. 이후 [[프랑스 침공]] 당시에는 이탈리아 남프랑스 침공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[[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|움베르토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히고 만다.]] 이탈리아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협조 아래 무솔리니 정부 추진으로 [[제2차 세계 대전]]에 추축국으로 참전하지만 졸전을 면치 못했다. 결국 1943년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항복했으나, 동시에 [[나치 독일]]이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[[이탈리아 사회 공화국]] 정부를 수립하여 연합군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이탈리아 북부는 큰 전쟁 피해를 겪었다. 무솔리니 정부의 실책으로 파시즘 세력만이 아닌 왕실까지 많은 반감을 사게 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움베르토 2세를 [[섭정]]으로 임명해 국왕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이양했다. 그는 새로 재편된 정부와 함께 연합군에 적극 협조하여 대(對) [[이탈리아 사회 공화국]] 전쟁을 수행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